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적정 의료 기술
Appropriate Medical Technology in the Era of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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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4차 산업혁명의 정의는 아직 명확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의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는 1차부터 4차까지의 산업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1].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으로 상징되는 기계화를 의미한다. 2차 산업혁명은 대량 생산(mass production)을 위한 전력(electric power)의 사용이 특징이었다. 3차 산업혁명은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자동화가 주요 특징이었다. 슈바프는 4차 산업혁명을 디지털 혁명(digital revolution)으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는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디지털 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기술의 융합이란 특징을 가진다고 설명하였다.
적정 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한 공동체의 정치, 문화, 환경적 측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을 의미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rnst Schumacher)는 이 개념의 기본을 정립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에 의하면 적정 기술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존재하며,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저렴해야 한다[2]. 아울러 자원의 낭비가 적고, 상대적으로 간단한 기술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적은 자원을 필요로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성능을 보장하는 기구나 장비에 ‘적정 기술’을 사용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본 론
적정 의료 기술(appropriate medical technology)의 사례
의료 분야에서 다음 몇 가지 사례가 적정 기술의 대표 사례로 알려져 있다. 자이푸르 의족(Jaipur prosthesis)은 분쟁 지역에서 지뢰를 밟아 발목을 잃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3]. 고무를 이용하여 저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손쉽게 보급이 가능하였다. 라이프스트로(LifeStraw)라는 간이 정수기는 믿을 만한 식수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건강에 대한 염려 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물을 마실 수 있게 제작되었다[4]. 폴드스코프(Foldscope)라는 간이 현미경은 1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약 2천배까지 사물을 확대하여 볼 수 있는 장비로, 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 말라리아 등 질병의 원인 감별을 위하여 널리 활용되고 있다[5]. 이외 적정 의료 기술의 다양한 사례가 보고되었다[6-8].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적정 의료 기술
4차 산업혁명으로 지칭되는 최신 기술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혁신을 촉진할 수 있지만 비교적 높은 비용 때문에 적정 기술의 전제를 만족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속적인 기술 발전에 따라 관련 비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많은 사람에게 경제적인 비용으로 보급할 수 있는 기술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이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적정 의료 기술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활 양식과 주변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다양한 사례가 있겠지만, 현재 의료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의 동력이 되고 있는 주요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빅데이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개인과 관련된 정보의 총량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전자의무기록의 확산과 함께 이들의 각종 의료 기록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의료 빅데이터 연구는 전산화된 의료 정보를 활용하여 질병의 병태생리를 이해하고, 최적의 환자진료를 모색하기 위하여 수행되는 연구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은 단일 보험자로 구성되어 거의 모든 전국민을 대상으로 수집된 청구 자료 및 건강검진 자료를 이용한 고품질의 실사용 증거(real world evidence) 연구가 가능하다[9].
통상 이러한 연구는 관찰 연구(observational study)의 범주에 포함된다. 따라서 무작위 대조 연구나 메타 분석에 비하여 그 근거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빅데이터 연구는 인구 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대용량 데이터 분석이 가능하므로 통상의 무작위 대조 연구와 차별화된 장점이 있다. 실제 일부 연구자들은 기존 무작위 대조 연구의 한계와 함께 보건의료의 의사 결정에 사용가능한 실행 가능 데이터(actionable data)로서 빅데이터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10].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미 의료 빅데이터를 이용한 다양한 연구 성과를 얻고 있다. 대한당뇨병학회, 대한비만학회 등 여러 학회에서 건강보험 청구자료를 이용하여 팩트 시트(fact sheet)라는 이름의 역학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11,12]. 또한, 부족한 한국인 대상 임상 연구의 현실적 대안으로 활용되어 임상 진료 지침 작성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13]. 국가 빅데이터는 고위험군의 질병 예측을 위해서도 활용되고 있다. 인공지능 등 새로운 분석 방법을 활용한 만성 질환 예측 시스템이 개발, 소개되고 있다[14].
최근에는 각 병원마다 다른 형식으로 저장된 의무 기록을 공통 형식(common data element, CDM)으로 변환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15]. 이러한 CDM 자료를 이용하면 기존 청구 자료에서 얻을 수 없는 다양한 변수를 이용한 빅데이터 연구 수행이 가능하다. 현재 한국의 여러 병원에서 이러한 CDM 구축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스마트폰
각종 이동 통신 기기의 보급률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높다. 특히,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도입된 지 약 10년이 지난 현재 국내 성인 인구의 약 95%가 사용할 정도로 급격히 확산, 보급되었다[16]. 스마트폰은 단순한 휴대용 전화 기능 외에도 다양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 저장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에 착안하여 사용자의 개인 정보, 생활 습관 그리고 의료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관리하고 이를 헬스케어의 다양한 영역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애플, 구글, 삼성 등 전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기반 기업에서는 개인의 건강 관리를 위한 스마트폰 기반의 건강관리 플랫폼을 개발, 활용하고 있다[17,18]. 또한, 이렇게 수집된 대규모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임상 연구 참여자를 모집하고, 이들의 경과 추적에 활용하여 다수의 성과를 국제 학술지에 보고하고 있다. 제도권 인프라의 부족으로 공중 보건 수준 향상에 어려움을 겪는 개도국에서도 개인의 건강 수준 향상을 위하여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비용 대비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19,20].
한국에서도 의료의 다양한 영역에 스마트폰이 적극 활용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다수의 연구 성과가 보고되었다. 저자의 전공 분야에 한정하여 예시하면, 스마트폰 기반 당뇨병자가 관리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용자의 관련 지표가 유의하게 향상되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21]. 체중 관리 애플리케이션 데이터를 이용한 후향적 코호트 연구 결과, 체중 감량에 대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의 긍정적 효과를 확인하였을 뿐 아니라 체중 감량을 위한 노력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인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22]. 또한, 이러한 데이터를 2차 자료와 연계하여 대사 질환의 임상 경과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환경 인자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23,24].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한 당뇨병성 망막병증 검사 도구 역시 인구집단의 효과적인 합병증 선별 검사에 좋은 성과를 보였다[25]. 최근에는 스마트폰 기반 당뇨병 관리 시스템의 임상적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무작위 대조 임상 연구가 수행되어 좋은 결과를 얻었다[26].
환자의 능동적 참여
일반적으로 환자와 그 가족들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상세한 정보를 얻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의료는 고도화된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전문 영역이므로 이러한 희망을 실현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의료가부장주의(medical paternalism)는 이러한 배경의 산물로, 환자에게 의사의 판단이 전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에 환자의 희망이나 선택을 굳이 존중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는 태도와 관행을 의미한다[27]. 하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 지식을 쉽게 검색하고 널리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보급되면서 오랜 관행에 점차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일부 환자와 그 가족은 자신들의 미충족 욕구(unmet needs)를 스스로의 역량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조직적인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한다. 최신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일부 당뇨병 환자들은 본인의 연속혈당측정기를 해킹하고 그 정보를 클라우드에 저장하여 애플리케이션, 웹, 또는 위젯 등 자신의 방식으로 데이터를 가공, 활용한다. 이렇게 연속혈당측정기를 임의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 수만명에 이른다[28]. 또한, 어떤 환자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구형 연속혈당측정계와 인슐린 펌프를 개조하여, 최신 장비와 비슷한 성능을 갖춘 인공췌장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29]. 이러한 방식으로 인공췌장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 이상이고, 누적 사용시간은 수십만 시간에 이르며, 안전성 역시 최신 기기에 필적한다고 주장한다[29]. 또한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하여 그 성능이 계속 향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의료기기의 임의 수입이나 개조 그리고 배포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새로운 시스템 도입에 적극적인 일부 환자들은 실정법 위반으로 고발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정보의 저변 확대에 따라 환자 스스로 미래 의료의 변화를 주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보수적 사회 시스템은 이러한 환자들의 요구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관련 제도의 개선을 위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결 론
미래 의료에 대한 핵심어로 흔히 ‘P4 medicine’이 거론된다[30,31]. 이는 미래 의료가 질병 예측(predict), 예방(prevent), 개인화(personalize), 환자 참여(participate)의 네 가지 핵심 요소에 기반한다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자체가 많은 사람의 참여를 전제하기 때문에 적정 기술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직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의 상당수가 비용이나 규제 관련 문제로 ‘적정 기술’로서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일상 의료의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확산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반적인 당뇨병 치료와 관리 영역에서 가장 보편화된 적정 의료의 사례로 자가혈당측정기를 예시할 수 있다. 1970년대 이 장비가 시장에 처음 출시된 시점에는 그 가격이 매우 높아 일부 사용자에서 제한된 용도의 사용만이 가능하였다[32]. 하지만 지속적인 기술 발전에 의해 장비의 가격이 계속 낮아져서, 이제는 누구나 사용 가능한 장비가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의료의 다양한 영역에서 더욱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